역사의 발전 앞에서 당당히 살고자 한 사람들,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 진보냐, 보수냐 하는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우리는 아직도 구태의연하게 네편, 내편 식의 줄세우기를 강요한다. 역사를 당당히 살다간 사람에게 사실 보수냐 진보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과 생각이 맞지 않다거나, 행동방략이 같지 않다고 해서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로 상통한 경우가 많았다.
---- 장준하 ----
1944년 목숨을 걸고 일본군 군대를 탈영해서,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험준한 파촉령을 넘어 도착한 중경에서, 백발이 성성한 임정 요인들은 -- 파쟁과 자당의 이해만을 추구
그는 차라리 다시 일군이 되어 임정을 폭파하는 편이 낫겠다고 비판했다.-_-;;
1919년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 독립운동 방략을 둘러싸고 논의가 치열할 당시 11월 3일 출범한 통합 상해 임정의 중심 인물은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노동국총판 안창호였다. 이들은 각각 외교독립론, 주전론, 실력양성론을 대변하고 있었다. 서재필은 무력독립투쟁론에 반대했는데, 사리사욕을 버리고 지구전에 대비하기 위해서 독립투쟁에 나선 청년은 학창으로 돌아가야 하고 독립의 방략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민중을 교양'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장준하는 주전론이 아닌 일제시대의 실력 양성론과 준비론의 논리에 크게 공감하고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평전들에는 장준하가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 입단하는 계기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1946년 4월 그러니까, 이범석이 귀국하는 6월 이전에 이미 장준하는 정계에서 천천히 발을 옮겨 청년운동 쪽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장준하는 사상계에 공산주의 글이나 나세르의 중립주의 등을 소개하기도 하였으나 그 자신은 중립주의 자체나 중립화 통일론을 격렬히 반대했다.
"우리는 국가나 민족만을 지상으로 삼는 고루한 국수주의자여서는 물론 아니 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국가 이익은 '자유와 민권'을 바탕으로 한 국가이다. 그러므로 국가 형태야 어찌되든지 덮어놓고 통일하고 보자는 일부의 환상적 논리에는 엄숙한 반성이 촉구되는 바이다. 또한 우리의 자유와 민권이 침해될 가능성을 예상시키는 여하한 형태의 중립주의도 용납될 수는 없다. 여기에 우리가 공산주의와 싸워 온 논거가 있는 것이다."
개헌 서명 운동으로 장준하는 긴급조치 1호 최초 위반자로서 비상군법회의 법정에서 최고형 15년, 자격정지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년여의 수감생활 뒤 신병으로 형집행 정직 되었을 때도 출감하자 곧 민주헌법 발의를 촉구하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하고, 1975년에는 민주회복과 개헌운동을 위한 범야당단일화를 추진하다 8월 결국 등산길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김병로 ---------------
"특수한 법률로 국가보안법 혹은 비상조치법을 국회에서 임시로 제정하신 줄 안다. 지금 와서는 그러한 것을 다 없애고 이 형법만 가지고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 또는 장래를 전망하면서 능히 우리 형벌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다는 고려를 해 보았다. 지금 국가보안법이 제일 중요한 대상인데, 이 형법과 대조해 검토해 볼 때 형벌에 있어서 다소 경중의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나, 이 형법만 가지고도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할 대상을 처벌하지 못할 조문은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일보의 입장과 배치되는 이 주장.
조선일보 2004년 9월 8일 사설에는 "국가보안법이 완전 폐지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가? 한국 국민이 북한 노동당에 가입하는 것을 법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어진다. 한국 내에서 북한 체제와 주체사상을 마음 놓고 전파하는 행위도 제재할 수가 없다. 방송관 신문에 김정일 정권을 찬양하는 프로나 글이 나와도 그만이다. 대학 강의실에서는 물론이고 서울 한복판에 주체사상연구소를 차려 놓고 학생들에게 주체사상을 학습시켜도 말리지 못한다. 전국 주요 도시에 일제히 인공기가 휘날리고 적기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김일성 추모 집회가 열려도 경찰이 막을 수가 없다.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는 시위가 열려도 속수무책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 상호 간의 증오와 갈등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던 그 시절, 대한민국 대법원장 김병로는 철저한 반공주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형법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조선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탄압과 회유에 넘어가 일제에 협력했다.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이들의 협력 문제는 오늘날까지 계속 논란이 된다. 그러나 김병로는 이 문제에서 자유롭다.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는 이전처럼 살아가기 어려워지자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농촌으로 내려가 닭과 돼지를 기르며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김병로는 민족주의자들이 결집한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에 참여했다. 한민당은 '조선 공산당' 등 좌파와 대립했지만, 김병로는 좌파와 대화를 주장했다. 이런 김병로의 태도는 신간회 활동에서 잘 드러나듯 일제 강점기부터 일관된 것이었다.
또한 김병로는 한민당이 토지개혁에 소극적이었던 것을 비판하고 대다수 농민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가 토지를 매입해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공산당 등 좌파에서 요구하던 토지의 무상 분배를 김병로가 주장한 까닭은 사상에 관계없이 일제 강점기 인권변호사로서 수많은 소작쟁의에 관여해 소작인들의 열악한 상황을 목격한 결과였다.
1946년 7월 미군정 사법부장(지금의 법무부장관)을 맡아 일제의 잔재를 쓸어 내고 해방된 나라에 적합합 법체계를 갖추는 데 일조한 김병로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탄생과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되었다. 이승만은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을 자신의 밑으로 끌어모아 힘을 키우는 데 힘써왔으며, 대법원장에 김병로가 아닌 다른 인물을 임명하려 했다. 하지만 김병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망받는 법조인이었다.
1919년 미국의 홈스 대법관은 '사상의 자유는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의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볼테르의 말인지 불확실해 졌지만 -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하지만 당신이 당신의 견해로 말미암아 탄압을 받는다면, 나는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당신과 함께 싸우겠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 독립운동가로 꼽힌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600억 원에 상당하는 재산을 처분해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 선생의 6형제는 가족 40명을 이끌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한국 민족운동단체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해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항일 투사를 길러 냈다.
이회영 선생의 6형제 중 5형제가 중국에서 순국했다. 6형제 중 다섯째 이시영(1869~1953)씨만 고국으로 돌아와 광복 후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이종걸 의원은 조부와 함께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책으로 엮었다. 지난 3월 출판한 '다시 그 경계에 서다'다. "조부와 독립 운동가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 2년여에 걸쳐 집필했다"고 한다. 이 의원은 "할아버지에 대해 알면 알수록 경외심이 생긴다"며 "30년 동안 일관되게 고통을 참고 나라에 헌신한 조부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분"이라고 존경을 표했다.
백사..이항복등...9명의 영의정과...1명의 좌의정을 배출한..전대미문의 집안 손자... 조부 우당(友堂) 이회영은(1867~1932) 만주 무력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아나키즘 사상가. 조선조 최고의 명문가 후손이었음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득권과 재산, 땀과 노력, 생명까지 모두 바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화신. 1932년 중국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중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 받다 자결함. 향년 65세. 해방 후 조국에 살아 돌아온 이회영의 형제는 동생 이시영 뿐이었음. (다른 형제들은 모두 중국에서 운명을 다함.)출처: 한토마 : 쓸만한 세상, 한겨레 필통 - ◎ 이종걸의원집안이 충신과 독립운동가로 빵빵하네요 !!
그런데 좀더 정확하게는 SNACK에 대한 소설이다.
일본에 있을 때 SNACK 이라는 간판을 보고 의아했다. 과자를 먹는 곳이라는 건가?-_-;;
그러다 일본측에서 회식에서 2차로 SNACK에 가게 되었고, 더 의아해졌다.
그런데 오쿠다 히데오와 취재진은 매 여행지마다 SNACK에 들린다.
호텔 부근의 스낵바에 들어가 흡연석에 자리를 잡았다. 여자가 둘뿐인 아담한 가게다.
"어서 오세요, 유카라고 합니다."
30세 정도의 호스티스가 말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다. 필시 예명이겠지. 그냥 술이나 마시자.
어째서 이 도시에 스내가가 많은지 물어 보았다.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옛날부터 그랬으니까."
시오가마 사람들은 스낵바를 좋아하나 보다. 뭐 그정도로 해두자.
호스티스가 신고 군의 카메라를 발견하고는 이것저것 묻는다.
출판사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자 자신은 책을 좋아한다고 한다.
"코고쿠 나츠히코나 기리노 나츠오, 그리고 아사다 지로 작가를 좋아해요."
손가락을 꼽으며 세고 있다.
음, 독서를 좋아하는군. '오'로 시작하는 작가를 아는지 물었다.
"오오사와 아리마사? 아, 좋아해요, 좋아해요"
그것 참 대단하군. 자 마시자. 건배.
관심도 없을 것이 뻔했다. 조카 아이들도 내 책은 읽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읽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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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의 솔직한 이야기 이기도 하다.
춤을 춘 사건도 그렇고...
선내로 돌아와 전망통로에서 벤치에 누워 <스타인벡 단편집>을 펼쳐 들었다. 구입해 놓고는 오랫동안 읽지 않고 쌓아 두었기 때문에 이번 짐 속에 넣어 온 것이다.
솔직히 외국 문학은 잘 모른다. 노벨상 작가라고 하니까 '이것이 문학이구나' 하는 것이지 사전에 정보가 없었다면 시시했을 것이다. 요컨대 나에게는 문학을 이해하는 소양이 없는 것이다. 겸손이 아니다.
일본 소설의 경우 5권에 3권 비율로 좌절을 느낀다. 상하권 같은 장편의 경우는 어지간하지 않으면 다 읽어 내지 못한다. 책은 흥미를 끄는 것 외에는 읽지 못한다. 만화조차 도중에 던져버린다.
스타인벡은 2편 읽고 끝, 감상은 잘 모르겠다. 하하. 그래도 작가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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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까지 마시고 해산했다. 호텔로 돌아와 막 잠옷으로 갈아입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유카 편집장이었다.
"제 방에서 한 잔 더 하지 않으시겠어요?"
응? 둘이서 마시자는 소린가. 왠지 목소리가 섹시했던 것도 같은데.....
일단 이를 닦았다.
막상 가보니 타로 군과 켄지 군이 모여 한참 흥이 나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술기운에 각자 자기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일종의 고백 비슷하다. 음, 모두가 그런 내용이다.
나도 무언가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가 되었다.
어쩔 수 없다. 적당히 이야기를 꾸며대고 그 자리를 모면하기로 했다.
소설가를 믿으면 안 된다. 재미있고 위험한 거짓말을 팔며 살아가는 직업인 것이다.
여러분은 거짓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상냥한 여 의사가 증세를 묻는다.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다. 눈앞에 눈부신 꽃이 피어난다.
마음속에서 종이 울려 퍼진다. 마치 영화 <트럭 일등성>같다고나 할까.
"모처럼 도쿄에서 오셨는데 지네에게 물리신 건가요?
고토 여행에서 뜻하지 않은 봉면을 당하셨네요."
여의사가 밝게 말했다. 둥근 얼굴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얼른 그녀의 왼손 약지를 본다. 반지가 엇다.
"그럼, 혈압을 재겠습니다."
나, 나,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습니까? 이섬에서 살겠습니다. 직업은 소설가입니다.
"최고 100, 최저 80이시네요. 정상입니다."
독설을 내뱉기도 하지만 사실은 순수합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그럼, X번 창구의 외과 앞에서 기다려 주세요."
저, 저 괜찮으시다면 이메일 주소라도 교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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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감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단조로운 생활을 동경한다. 어시장이 파하면 예외 없이 하루가 끝난다. 기분 좋게 한잔 걸치고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람직한 인생이다. '보람'이나 '자아 찾기'와 같은 것은 현대병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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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인간은 새로운 고통을 안게 되었다. 자기 자신을 상품화해서는 안 된다. 도대체 어떻게 할 셈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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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우동은 견당사선에 의해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결국 일본우동의 원조가 되는 셈입니다.
나는 근본이 토카이 인이다.
된장은 붉은 된장인 아카미소가 최고고, 고기구이는 삼겹살, 야구는 드래건즈, 그리고 장어는 단연코 '찜'이 아닌 '구이'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지, 나는 지금 나고야에서 장어덮밥을 먹고 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나는 지금 나고야에서 장어덮밥을 먹고 있다. 장어덮밥 원조 요릿집, 호라이켄은 매스컴을 통해서도 잘 알려진 요릿집 중의 요릿집이다. 신칸센을 타고 먹으로 올 만한 가치가 있다. 호라이켄에서 장어덮밥을 먹은 후 나고야 돔에서 야구를 관전하는 것, 이것이 드래건즈 팬의 이상적인 하루다.
마츠시마는 세상이 다 아는 일본 삼경의 하나라고 한다.
고토 후쿠에 항
384번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달렸다. 차량 라디오를 틀자 깨끗한 한국어 방송이 튀어나왔다. 'AAA 합니다' 그렇다, 이곳은 혼슈보다 한반도에서 더 가까운 곳이다. 제주도가 바로 옆이라 해도 될 정도다. 하지만 이곳은 일본 땅이므로 영토권 주장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